2015년 6월 15일 월요일

붙잡지 않으면 흩어져 사라질 순간들

 나는 사진 찍는 걸 싫어했던 아이였다. 아빠가 늘 "거기 서 봐. 아니 거기 말고 좀 더 앞으로..." ," 웃어야지." 이렇게 말하며 사진을 찍을 때 나는 그게 너무 귀찮고 뭔가 억지스럽게 느껴져 싫었다. 가끔 앨범을 들여다 보면 마지못해 웃었던 사진은 여전히 보기 쑥스럽고 정말 기쁘고 행복할 때 찍힌 사진은 볼 때 마다 새로운 행복한 웃음을 부른다. "어쨌거나 나중에 남는 건 사진 뿐이다"는 말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하고 있는 말이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기억을 믿지 않게 된 이후로...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것이 100% 일 수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사진이던 일기던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모든 순간들은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져 없던 일과 다름없어진다는 걸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어떤 일들은, 예를 들면 너무 창피했던 일이나 떠올리기도 싫을만큼 힘들었던 일들이야 잊혀진다한들 무엇이 아쉬울까만(오히려 그렇게 해주는 내 잠재의식이 고마울 정도) 기쁘고 행복하고 다시 없을 것 같은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그렇게 이 순간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게 될 것도 모두 두렵다. 모든 것이 시간처럼 찰나를 스쳐 지나갈 뿐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알수록 더욱 더 아무도,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다.
 매년 11월이면 다이어리를 사는 일도 6년이 되었다. 일년에 한 번 사는 것이니 겨우 여섯 번에 불과하지만 나에겐 의미가 큰 행사다. 우선 다음 한 해의 삶의 목표을 정하고 계획한다. 지난 해의 것들은 이랬다. 첫 해였던 2010년의 목표는 "매일 기쁘게 웃는 한 해", 한국어 강사 시험을 준비하던 2012년은 "공부하는 한 해", 스페인에서 살기로 마음 먹었던 2014년은 "준비하는 한 해"였다. 2010년은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매일 기쁘게 웃으려 했고, 2012년은 퇴근 후 새벽까지 인터넷 강의를 들어가며 시험 준비를 했다. 2014년은 스페인어 스터디와 회화 과외를 하며 '준비'를 했다. 올해는 "적응하는 한 해". 아무튼 이렇게 목표를 정해놓고는 주루룩 열 두 달의 날짜를 채워넣고, 가족과 친구들의 생일을 표시한다. 1월부터는 안 쓴다. 흔한 다이어리 쳐 박아두기와 흡사하지만, 내 다이어리는 복기를 위해 존재한다. (사실 구차한 변명......매일 쓰기 귀찮아서 몰아쓰는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보름 단위로 밀린 일기 쓰듯 칸을 채우고 있지만, 기억이 모자랄 땐 핸드폰 사진첩을 뒤적이게 된다. 좋은 기술 덕에 난 기억하지 못해도 기계에는 언제 어디서 찍힌 사진인지 표시되어있다. 어차피 기를 쓰고 기억해내어 다이어리에 남기는 것들도 결국 기억의 재구성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기필코 몰아 쓰고 사진을 찍는 건 이것들이 모자란 내 기억을 도와 훗날 잊고 지내던 어떤 날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길 기대하는 마음에서다. 당장은 몹시 행복하고, 혹은 너무 우울하고, 무척 힘들고 꼭 죽을 것만 같은 순간들도 시간의 힘에 밀려 잊혀지는 때가 반드시 온다. 영화 필름컷들처럼 인생도 이어진 하나의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결국 붙잡지 않으면 이 우주 어딘가로 흩어져버릴 순간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이놈의 흔적을 잡아채 남겨두자. 차곡 차곡 이 단서들을 모아 다시 오늘을 기억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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