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7일 토요일

채비

채비
[명사] 어떤 일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물건, 자세 따위가 미리 갖추어져 차려지거나 그렇게 되게 함. 또는 그 물건이나 자세.

채비를 시작했다. 비행기표를 끊는데서부터 여행의 채비가 시작된다. 한번 표를 무른 적이 있긴 하지만, 환불 수수료가 부담스러운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은 표 구입이 첫 순서다. 계획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계획을 아무리 세워 본다한들 실행 여부의 차원에서 일단 표를 사야한다. 그래서 더 이상 갈지 말지를 고민함이 없이 가야만 하게 될 때에서야 비로소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실행 이전 많이 고민하는 결정장애적 성격의 특성상 사고를 쳐서 내지른 다음에야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여행의 목적 또는 성격, 동선, 놓치지 말아야 할 미션들, 물론 여행지에 입을 옷과 장신구의 코디네이션도 생각한다. 대략 한 달 전쯤부터 하나씩 챙겨나가다가 마지막 3일은 고도의 집중력으로 짐 무게를 줄이고 이동의 편이를 도모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적어도 목적지에 도착하기전까지는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그런 스트레스가 막상 여행지에서 jet leg-시차문제-를 일으키는지도 모르지. 공간의 이동에 따른 강제적 시차 적응도 원인이겠지만, 각성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후유증이랄까, 암튼.

 이번에도 지난 화요일부터 어김없이 채비가 시작됐다. 출국일을 기다리면서 남은 시간 동안 해야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들을 재빨리 찾아내고 순서를 정해 실행한다. 5일 동안 지인들에게 출국일을 알렸고, 그전에 만나야한다는 강제 섞인 제안을 했다. 짐을 쌀 가방을 준비했고, 실제로 받아보고 깜짝 놀란 사이즈의 '이민가방'이라는 것을 펼쳐  하나씩 채우고 있다. 면세점 사이트에 출국정보를 업데이트 한 후 받은 쿠폰들로 물건을 사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것들은 모두 이전의 메뉴얼과 동일해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웠지만, 이번은 조금 긴 여행이 될 것이란 예감이 스멀거려 하나를 더 준비해야 했다. 그렇지, 마음의 준비. 
 
 내 삶의 또 다른 막이 열릴거라 예견되는 상황에서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볼 겸, 부모님께도 당신들의 딸로 태어나 이렇게 자라나기까지를 정리해 선물해 드리면 좋겠다 싶어 포토북을 만들었다. 만들고 보니 여간 만족스러운게 아니다. 이렇게 좋을수가. 옛날 사진들은 필름 사진을 다시 찍어 출력하다보니 화질도 다 엉망에 얼굴 윤곽만 보이는 사진도 많지만 이렇게 주욱 늘어놓고 보니 주마등 같다. 벌써 세 번이나 다시 열어봤다. 그런데 볼 수록 마음을 일렁이는 것이 자꾸 뭔가 그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160장이 넘는 많은 사진들 중에서도 가족 모두 야구장에 가던 어느 오후 부모님과 동생이 이야기하며 걸어가는 뒷모습들을 내가 찍은 것이 있는데, 이 사진이 묘하게 눈물을 불렀다. 그 때 그 날의 공기와 느낌을 훗날 내가 얼마나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까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시범경기라도 하나 꼭 보고 가야지 하는 멍청하고 살짝 옆으로 빠지는 요상한 다짐을 보탰다. 

 저녁마다 오늘은 맥주, 오늘은 막걸리, 오늘은 와인이 땡긴다며 술을 부추기고, 요리 본능이 꿈틀대는 날은 밤 열시에 스파게티를 하거나 기대도 없던 음식을 만들어서 맛있냐고 캐묻고, 뉴스를 보면서 까칠한 오만상을 그리며 쌍욕을 튀튀 내뱉거나, 듣도 보도 못한 Los panchos나 Ella Fitzgerald, Bossa 같은 것들을 틀어놓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냐고 강요하고, 솔직히 얘기한다느니 합리적이라느니 따위의 말을 갖다붙여 고드름같이 차가운 말들로 벽을 세우고, 어디서 다 알게 되고 주워들었는지 신기할 정도의 잡정보들에 기반한 잔소리를 늘어놓는, 이 조합의 성향을 가진 한 존재의 부재가 이 가정에 어떤 상실감이나 고독을 남기게 될지 걱정이 되자 마음은 아리고 눈은 시려온다. 으읍...
그리고 너, 너는 지난 번 학습된 3개월을 지나서도 과연 평이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을까. 문득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마음에 덧댄 창마저 파고 드는 바람에 심장이 선덕선덕해지면 어떡하나 내심 두렵기도 하다. 이미 선택했으니 충실히 버텨낼테다. 어차피 시간을 빌려쓰다가는 인생에서, 시간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인간으로선 버티기가 최선이니까... 내용이 어떻든 시간을 흘러가게 마련이니까. 

 이쪽 세계의 떠남은 저쪽 세계에서의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여행 무드에 감상에 빠진 지금의 잠시를 지나면 다시 살 궁리로 바빠지겠지. 어떤 방향으로든 좌표를 향해 조금 조금씩 움직여 나가야 한다. 지난 5년이 내게 알려준 것이 그거였다. 매일이 그저 그런 일상들의 반복이어도, 조금 긴 단위의 시간을 두고 뒤돌아 보면 어떤 한 방향으로 조금씩 흐르고 있었고 그 방향은 나의 크고 작은 순간적 선택에 따라 움직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지난 시간들을 밟고 지금 이 자리 이 지점을 내가 지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의 채비는 단지 15시간의 비행을 통한 여행이 아닌, 얼마일지 모를 내 나머지 빚낸 시간들을 채우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 모든 생각의 끝에 바라게 되는 한 가지는 부디 이 우울과 걱정과 긴 고민의 중압을 누르고 유쾌하게 깔깔 웃으며 신나는 하루들을 보내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비를 해두되, 오늘은 오늘 내일은 내일이니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