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진 찍는 걸 싫어했던 아이였다. 아빠가 늘 "거기 서 봐. 아니 거기 말고 좀 더 앞으로..." ," 웃어야지." 이렇게 말하며 사진을 찍을 때 나는 그게 너무 귀찮고 뭔가 억지스럽게 느껴져 싫었다. 가끔 앨범을 들여다 보면 마지못해 웃었던 사진은 여전히 보기 쑥스럽고 정말 기쁘고 행복할 때 찍힌 사진은 볼 때 마다 새로운 행복한 웃음을 부른다. "어쨌거나 나중에 남는 건 사진 뿐이다"는 말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하고 있는 말이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기억을 믿지 않게 된 이후로...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것이 100% 일 수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사진이던 일기던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모든 순간들은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져 없던 일과 다름없어진다는 걸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어떤 일들은, 예를 들면 너무 창피했던 일이나 떠올리기도 싫을만큼 힘들었던 일들이야 잊혀진다한들 무엇이 아쉬울까만(오히려 그렇게 해주는 내 잠재의식이 고마울 정도) 기쁘고 행복하고 다시 없을 것 같은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그렇게 이 순간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게 될 것도 모두 두렵다. 모든 것이 시간처럼 찰나를 스쳐 지나갈 뿐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알수록 더욱 더 아무도,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다.
매년 11월이면 다이어리를 사는 일도 6년이 되었다. 일년에 한 번 사는 것이니 겨우 여섯 번에 불과하지만 나에겐 의미가 큰 행사다. 우선 다음 한 해의 삶의 목표을 정하고 계획한다. 지난 해의 것들은 이랬다. 첫 해였던 2010년의 목표는 "매일 기쁘게 웃는 한 해", 한국어 강사 시험을 준비하던 2012년은 "공부하는 한 해", 스페인에서 살기로 마음 먹었던 2014년은 "준비하는 한 해"였다. 2010년은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매일 기쁘게 웃으려 했고, 2012년은 퇴근 후 새벽까지 인터넷 강의를 들어가며 시험 준비를 했다. 2014년은 스페인어 스터디와 회화 과외를 하며 '준비'를 했다. 올해는 "적응하는 한 해". 아무튼 이렇게 목표를 정해놓고는 주루룩 열 두 달의 날짜를 채워넣고, 가족과 친구들의 생일을 표시한다. 1월부터는 안 쓴다. 흔한 다이어리 쳐 박아두기와 흡사하지만, 내 다이어리는 복기를 위해 존재한다. (사실 구차한 변명......매일 쓰기 귀찮아서 몰아쓰는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보름 단위로 밀린 일기 쓰듯 칸을 채우고 있지만, 기억이 모자랄 땐 핸드폰 사진첩을 뒤적이게 된다. 좋은 기술 덕에 난 기억하지 못해도 기계에는 언제 어디서 찍힌 사진인지 표시되어있다. 어차피 기를 쓰고 기억해내어 다이어리에 남기는 것들도 결국 기억의 재구성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기필코 몰아 쓰고 사진을 찍는 건 이것들이 모자란 내 기억을 도와 훗날 잊고 지내던 어떤 날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길 기대하는 마음에서다. 당장은 몹시 행복하고, 혹은 너무 우울하고, 무척 힘들고 꼭 죽을 것만 같은 순간들도 시간의 힘에 밀려 잊혀지는 때가 반드시 온다. 영화 필름컷들처럼 인생도 이어진 하나의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결국 붙잡지 않으면 이 우주 어딘가로 흩어져버릴 순간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이놈의 흔적을 잡아채 남겨두자. 차곡 차곡 이 단서들을 모아 다시 오늘을 기억할 수 있도록.......
2015년 6월 15일 월요일
2015년 3월 7일 토요일
채비
채비
[명사] 어떤 일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물건, 자세 따위가 미리 갖추어져 차려지거나 그렇게 되게 함. 또는 그 물건이나 자세.
채비를 시작했다. 비행기표를 끊는데서부터 여행의 채비가 시작된다. 한번 표를 무른 적이 있긴 하지만, 환불 수수료가 부담스러운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은 표 구입이 첫 순서다. 계획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계획을 아무리 세워 본다한들 실행 여부의 차원에서 일단 표를 사야한다. 그래서 더 이상 갈지 말지를 고민함이 없이 가야만 하게 될 때에서야 비로소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실행 이전 많이 고민하는 결정장애적 성격의 특성상 사고를 쳐서 내지른 다음에야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여행의 목적 또는 성격, 동선, 놓치지 말아야 할 미션들, 물론 여행지에 입을 옷과 장신구의 코디네이션도 생각한다. 대략 한 달 전쯤부터 하나씩 챙겨나가다가 마지막 3일은 고도의 집중력으로 짐 무게를 줄이고 이동의 편이를 도모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적어도 목적지에 도착하기전까지는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그런 스트레스가 막상 여행지에서 jet leg-시차문제-를 일으키는지도 모르지. 공간의 이동에 따른 강제적 시차 적응도 원인이겠지만, 각성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후유증이랄까, 암튼.
이번에도 지난 화요일부터 어김없이 채비가 시작됐다. 출국일을 기다리면서 남은 시간 동안 해야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들을 재빨리 찾아내고 순서를 정해 실행한다. 5일 동안 지인들에게 출국일을 알렸고, 그전에 만나야한다는 강제 섞인 제안을 했다. 짐을 쌀 가방을 준비했고, 실제로 받아보고 깜짝 놀란 사이즈의 '이민가방'이라는 것을 펼쳐 하나씩 채우고 있다. 면세점 사이트에 출국정보를 업데이트 한 후 받은 쿠폰들로 물건을 사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것들은 모두 이전의 메뉴얼과 동일해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웠지만, 이번은 조금 긴 여행이 될 것이란 예감이 스멀거려 하나를 더 준비해야 했다. 그렇지, 마음의 준비.
내 삶의 또 다른 막이 열릴거라 예견되는 상황에서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볼 겸, 부모님께도 당신들의 딸로 태어나 이렇게 자라나기까지를 정리해 선물해 드리면 좋겠다 싶어 포토북을 만들었다. 만들고 보니 여간 만족스러운게 아니다. 이렇게 좋을수가. 옛날 사진들은 필름 사진을 다시 찍어 출력하다보니 화질도 다 엉망에 얼굴 윤곽만 보이는 사진도 많지만 이렇게 주욱 늘어놓고 보니 주마등 같다. 벌써 세 번이나 다시 열어봤다. 그런데 볼 수록 마음을 일렁이는 것이 자꾸 뭔가 그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160장이 넘는 많은 사진들 중에서도 가족 모두 야구장에 가던 어느 오후 부모님과 동생이 이야기하며 걸어가는 뒷모습들을 내가 찍은 것이 있는데, 이 사진이 묘하게 눈물을 불렀다. 그 때 그 날의 공기와 느낌을 훗날 내가 얼마나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까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시범경기라도 하나 꼭 보고 가야지 하는 멍청하고 살짝 옆으로 빠지는 요상한 다짐을 보탰다.
저녁마다 오늘은 맥주, 오늘은 막걸리, 오늘은 와인이 땡긴다며 술을 부추기고, 요리 본능이 꿈틀대는 날은 밤 열시에 스파게티를 하거나 기대도 없던 음식을 만들어서 맛있냐고 캐묻고, 뉴스를 보면서 까칠한 오만상을 그리며 쌍욕을 튀튀 내뱉거나, 듣도 보도 못한 Los panchos나 Ella Fitzgerald, Bossa 같은 것들을 틀어놓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냐고 강요하고, 솔직히 얘기한다느니 합리적이라느니 따위의 말을 갖다붙여 고드름같이 차가운 말들로 벽을 세우고, 어디서 다 알게 되고 주워들었는지 신기할 정도의 잡정보들에 기반한 잔소리를 늘어놓는, 이 조합의 성향을 가진 한 존재의 부재가 이 가정에 어떤 상실감이나 고독을 남기게 될지 걱정이 되자 마음은 아리고 눈은 시려온다. 으읍...
그리고 너, 너는 지난 번 학습된 3개월을 지나서도 과연 평이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을까. 문득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마음에 덧댄 창마저 파고 드는 바람에 심장이 선덕선덕해지면 어떡하나 내심 두렵기도 하다. 이미 선택했으니 충실히 버텨낼테다. 어차피 시간을 빌려쓰다가는 인생에서, 시간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인간으로선 버티기가 최선이니까... 내용이 어떻든 시간을 흘러가게 마련이니까.
이쪽 세계의 떠남은 저쪽 세계에서의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여행 무드에 감상에 빠진 지금의 잠시를 지나면 다시 살 궁리로 바빠지겠지. 어떤 방향으로든 좌표를 향해 조금 조금씩 움직여 나가야 한다. 지난 5년이 내게 알려준 것이 그거였다. 매일이 그저 그런 일상들의 반복이어도, 조금 긴 단위의 시간을 두고 뒤돌아 보면 어떤 한 방향으로 조금씩 흐르고 있었고 그 방향은 나의 크고 작은 순간적 선택에 따라 움직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지난 시간들을 밟고 지금 이 자리 이 지점을 내가 지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의 채비는 단지 15시간의 비행을 통한 여행이 아닌, 얼마일지 모를 내 나머지 빚낸 시간들을 채우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 모든 생각의 끝에 바라게 되는 한 가지는 부디 이 우울과 걱정과 긴 고민의 중압을 누르고 유쾌하게 깔깔 웃으며 신나는 하루들을 보내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비를 해두되, 오늘은 오늘 내일은 내일이니까...
2015년 2월 20일 금요일
여우난골족
오늘은 2015 설 연휴의 마지막날이다.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에는 명절의 여흥을 끝내려 가족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와 우리 가족, 이모네 역시 그렇게 한 테이블을 채웠다. 상반기에 설, 하반기에 추석이면 일 년이 간다고 추석을 지내고 나면 이제 올해 숙제 다했다고 다음 설까지는 걱정없다고 엄마는 늘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음력으로 어제가 새해 첫 날이었는데도, 한 해의 반이 훅 지나간 느낌이다. 한 시가 다 되어가는 지금 잠도 안 자고 이렇게 쓰고 앉은 것은 먹은 갈비가 아직 소화되지 않음이 아닌 늦게 자는 습관 때문일뿐이리라. 그럼 이제 자 볼까 하다 엄마가 깨끗이 세탁해 준 이불보를 갈아 씌우고 책장을 두리번거리다 백석시집을 들게 되었다. 한 삼 년만인가. 처음 책장을 볼 땐 분명 당나라 시선집을 꺼내려했지만 뽑아낸 건 백석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펼치는 책은 항상 처음인듯 머릿말부터 다시 시작하다가 30쪽 내외에서 접는게 재미지. 그리고 다섯 번째로 읽은 시가 <여우난골족>이다.
그전 같았으면, 우리도 여기 백석시인네처럼 엄매 아배따라 욱이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가 있던 진할아버지가 있었던 경주집으로 갔을텐데 올해부터 우린 삼촌네가 새벽부터 바삐 와야 할 큰집이 되었다. 시를 읽으면서 시인과 비슷했던 20년간의 우리의 40여 번의 명절과 20번의 할아버지 기일과 그만큼의 할머니 생신이 기억났다. 사실 그 보다 자주 우리는 함께 피서를 가고 소풍을 갔었다. 그러는 중에 나와 내 밑으로 어린 녀석들은 낮이면 같이 물놀이를 하고, 윷놀이를 했으며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밤에는 역시 잠자리 다툼이 있었고 그것은 주로 따뜻한 안방을 두고 또 각자의 엄마와 함께 잘 것과 코곯이가 심하신 할머니를 피하는 것을 두고 하는 것이었다. 한 가지 더 , 좋은 베개 고르는 것도 은근 경쟁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그런 시덥잖은 것들로 우리는 다투고 웃으며 20년의 긴 세월을 보내 온 것이다. 그런데 꼬마들이 자라나면서 실상 명절의 재미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구성원 100%의 참가율이 슬슬 학업과 군대 등등으로 점점 60-70%로 낮아졌고, 놀던 아이들은 일꾼이 되어 전을 부치기 바빠졌다. 산중으로 성묘를 가신 어른들을 기다리며 끓여 먹던 라면이나, 내 주도로 이루어진 청소 작전, 성묘 후 돌아오시며 사다 주신 아이스크림은 사진처럼 머릿속에 남았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우리는 없다. 이제 우리들의 "우리"가 달라졌다. 아이들을 어른으로 키워 낼 만큼 꽤 긴 시간이 흘렀음이고, 이후의 명절은 각자들의 "우리"와 함께하게 될 터였다.
모든 일이나 순간은 기억에서 사라지면 애초에 없었던 것과 다름없이 된다. 사진이나 비디오, 녹음, 일기 혹은 기록 등의 보조장치가 없이 사람의 기억에만 의존할 때, 기억에서 사라지면 그 일은 애초에 없던 일처럼 아무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기억해야만 한다. 당신의 세계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그 시절은 다시 없자난 이제 나에게 당시에 먹었던 경주 시내에서 팔던 팥하드나, 한과 강정-튀긴 쌀, 땅콩, 설탕시럽과 물엿으로 만든 우리가 "박상"이라고 불렀던-과, 걸쭉했던 추어탕, 고작 세개에서 다섯 남잣 열리던 석류로 기억되겠지. 잊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과 함께... 또한 같은 시간과 장소에 있었던 여러 당신들 또한 그렇게 사소한 것들과 나를 묶어 우리였던 시절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다음 추석때까지.
2015년 2월 7일 토요일
김연수
2015.2.7.토요일. 맑고 봄 같은 날씨
김연수 작가를 만나다.
미은이와 송정에 있는 쿠무다라는 북까페에서 열린 김연수 작가의 북콘서트에 갔다. 이건 아주 우연히 생긴 일이고 큰 행운이었다. 일주일 전 미은이가 "송정집"이라는 곳에 식사를 하러 가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죽을때까지 몰랐을 수도 있을 일이었다. 그저 어느 북카페에서 이뤄진 최소규모의 북콘서트일 뿐이었다.
김연수 작가의 글을 읽게 된 것 역시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누구의 소개나 추천도 없이, 그저 책방에 들러 이리저리 책구경을 하다 한 소설책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빨간 바탕에 에곤쉴레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에곤쉴레나 구스타프 클림트 역시 미은이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 책이 <밤은 노래한다>이고, 그 때가 2009년 6월 18일이었다. 그러니까 6년째 그의 글을 읽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림 하나로 책을 사게 할 만큼 강렬한 표지만큼 단번에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의 글을 애정하게 된 것은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서부터다. 슴슴한 맛의 그의 글은 따박따박 논리를 따지면서도 언어적 유희가 있고, 애매한 감정을 적절한 단어를 써서 글로 표현하는 특징이 있었다. 가볍게 툭툭 투덜대듯 들리는 문투도 마음에 들었다. 에세이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책 속의 시들은 당송시와 하이쿠까지 찾아보게 해서 내게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어제 잠들기 전, 북콘서트 참여의 사전 작업으로 김연수 작가의 글들에 대해 자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책을 가장 좋아하는지, 인상 갚은 구절이나 부분이 있는지,와 같은 것들이었다.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조금 어렵지만, 그 중 특히 아끼는 책은 역시 <청춘의 문장들>과 <지지 않는다는 말>,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사랑이라니, 선영아> 이렇게 다섯 권이다. 인상 깊은 구절이라면 몇 가지가 있다.
1.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작가의 말
2. 책들의 제목,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우리가 보낸 순간>, <여행할 권리>, <지지 않는다는 말>,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사랑이라니, 선영아>
- 그래서 오늘 책 제목을 직접 짓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실패....
3. 평생 최고의 노래만 듣는 방법
등등.... 기억이 안나므로 여기까지만.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한 그의 글을 읽었을 때 누가 자꾸 나에게 글을 쓰라고 태우는 것만 같은 옆구리의 간지럼을 느낀다. 오늘 매일 조금씩 글을 쓰는 것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끝은 결국 이렇게 일기를 쓰는 것으로 남았다.
이제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을 짚어 줄 시간. 여운이 가시기 전에 읽었으면 하는 욕심이 든다. 의욕 과다, 일주일은 자겠지. 암튼 생각보다 꽤 있었다, 읽은 책도 읽을 책도... 20년간 쓴 책이 좀 많아서 전부 다는 읽지 못했을 거라던 김연수 작가의 말을 확인하는 순간.
1. 꾿빠이, 이상
2. 내가 아이였을 때
3. 7번 국도 Revisited
4.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5. 소설가의 일
미은이 덕분에 행복한 시간이었다. 더불어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았으니 더 바랄게 없다. 여전히 많은 것들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고맙고 기뻤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남기며...
2015년 1월 6일 화요일
청소
며칠동안 청소만했다.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이제는 철 지나 입지 않는 옷들,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들, 지우고 싶은 기억과 연동되는 흉물들을 버렸다. 이사 가는 짐 못지 않게 버리고 또 버렸다. 그러면서 얼마나 많은 쓰레기들과 살아왔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 순간에는 모두 필요하다고 여겨져서 돈과 바꾼 것들인데 이제 쓰임이 없으니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
한참 ZARA며 MNG, 꼬르떼 잉글레스(El Corte ingles)까지 Sol광장의 옷가게들을 출근도장 찍듯 드나들었던 때가 있었다. 매주 신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도, 결국 난 내가 고집하는 스타일의 옷만 골라보고 마음에 드는 한 두가지 정도만 구입했다. 그마저도 없는 대부분의 경우 빈 손으로 둘러보기를 반복했을 뿐이다. 그럼 그 나머지 수천 수만의 옷들은 어디로 가는가...버려지는 것이었다. 각자의 기호가 다르고 내 선택 밖의 옷들이 가상 쓰레기라면, 내가 고른 이 옷 역시 누군가의 가상쓰레기인 셈이다. 결국 우린 쓰레기 더미에서 골라입는 것이었다. 내가 국제시장에서 중고 옷들을 헐값으로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때 새 옷이라며 신이나 돈을 주고 가져온 것들이 이제 재활용 옷 수거함에 담겨지고 그것들이 팔려나가 언젠가 다시 국제시장 중고 옷가게에 돌아오는 순환이다. 그걸 깨달은 밤 이후로 나의 옷 욕심은 조금 더 통제가 쉬워졌다. 내가 지금 사는 게 잠재적 쓰레기라는 생각을 한 후에...
옷 뿐만은 아니다. 학생용 책상 스탠드, 토스터, 접시, 열쇠고리, 말로 늘자면 그 이름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 사소한 잡동사니들 모두가 쓰레기였다. 필요하다고 사 둔 것들은 어쨌건 쓰임이 없어지는 순간, 의미를 잃고 쓰레기가 되었다.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잊고 싶은 사람들, 기억 속에 묻어버려야 좋을 것들에 대한 사진은 모두 찢겨져 나갔다. 내 사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바 흑역사인 나도 모르고 싶은 나의 못난 과거들은 사진과 함께 버려졌다. 그러고보니, 지금 당장 없으면 안될 것 같은 그 무엇, 혹은 그 누군가는 절대 없어선 안될 것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들 없이도 이렇게 잘 살고, 버리고 싶은 것이 되기도 하니까......
엄마는 제발 그런 허무한 인생무상 같은 소리 좀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이건 좀 다르다. 난 그게 의미없으니 거기에 집착하거나 메일 이유가 없다는 뜻이지 다 허무하니 포기하자는게 아니다. 그저 너무 목숨걸지는 말자는 거지.
치워도 치워도 버려도 버려도 나오던 쓰레기는 일단 정지 상태다. 내가 기준을 높이면 잠재적 쓰레기들은 실질적 쓰레기가 된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쓰레기는 계속 늘어간다. 새로운 물건을 매일 구입하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 잠재적 쓰레기를 사고 그걸 실질적 쓰레기로 바꿔 버리는 굴레에 갇혀있다. 생이 지속되는 이상 누구도 이것은 멈출 수가 없다. 세상 어느 곳의 청렴한 종교인도 마찬가지다. 매일 음식물을 먹고 똥을 싼다. 음식물이 잠재적 쓰레기이고 똥이 실질적 쓰레기이다. 이런 식이라면 생과 사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남과 죽음 역시 각각에 대입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순환과 그것의 반복이다. 윤회. 돌고 돎.
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것은 깨달음에서 시작되는 해탈이다. 깨고 벗어나서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것.
아... 이렇게 연결되다니... 청소하다가...
암튼 청소 한 번 잘했다.
한참 ZARA며 MNG, 꼬르떼 잉글레스(El Corte ingles)까지 Sol광장의 옷가게들을 출근도장 찍듯 드나들었던 때가 있었다. 매주 신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도, 결국 난 내가 고집하는 스타일의 옷만 골라보고 마음에 드는 한 두가지 정도만 구입했다. 그마저도 없는 대부분의 경우 빈 손으로 둘러보기를 반복했을 뿐이다. 그럼 그 나머지 수천 수만의 옷들은 어디로 가는가...버려지는 것이었다. 각자의 기호가 다르고 내 선택 밖의 옷들이 가상 쓰레기라면, 내가 고른 이 옷 역시 누군가의 가상쓰레기인 셈이다. 결국 우린 쓰레기 더미에서 골라입는 것이었다. 내가 국제시장에서 중고 옷들을 헐값으로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때 새 옷이라며 신이나 돈을 주고 가져온 것들이 이제 재활용 옷 수거함에 담겨지고 그것들이 팔려나가 언젠가 다시 국제시장 중고 옷가게에 돌아오는 순환이다. 그걸 깨달은 밤 이후로 나의 옷 욕심은 조금 더 통제가 쉬워졌다. 내가 지금 사는 게 잠재적 쓰레기라는 생각을 한 후에...
옷 뿐만은 아니다. 학생용 책상 스탠드, 토스터, 접시, 열쇠고리, 말로 늘자면 그 이름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 사소한 잡동사니들 모두가 쓰레기였다. 필요하다고 사 둔 것들은 어쨌건 쓰임이 없어지는 순간, 의미를 잃고 쓰레기가 되었다.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잊고 싶은 사람들, 기억 속에 묻어버려야 좋을 것들에 대한 사진은 모두 찢겨져 나갔다. 내 사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바 흑역사인 나도 모르고 싶은 나의 못난 과거들은 사진과 함께 버려졌다. 그러고보니, 지금 당장 없으면 안될 것 같은 그 무엇, 혹은 그 누군가는 절대 없어선 안될 것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들 없이도 이렇게 잘 살고, 버리고 싶은 것이 되기도 하니까......
엄마는 제발 그런 허무한 인생무상 같은 소리 좀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이건 좀 다르다. 난 그게 의미없으니 거기에 집착하거나 메일 이유가 없다는 뜻이지 다 허무하니 포기하자는게 아니다. 그저 너무 목숨걸지는 말자는 거지.
치워도 치워도 버려도 버려도 나오던 쓰레기는 일단 정지 상태다. 내가 기준을 높이면 잠재적 쓰레기들은 실질적 쓰레기가 된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쓰레기는 계속 늘어간다. 새로운 물건을 매일 구입하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 잠재적 쓰레기를 사고 그걸 실질적 쓰레기로 바꿔 버리는 굴레에 갇혀있다. 생이 지속되는 이상 누구도 이것은 멈출 수가 없다. 세상 어느 곳의 청렴한 종교인도 마찬가지다. 매일 음식물을 먹고 똥을 싼다. 음식물이 잠재적 쓰레기이고 똥이 실질적 쓰레기이다. 이런 식이라면 생과 사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남과 죽음 역시 각각에 대입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순환과 그것의 반복이다. 윤회. 돌고 돎.
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것은 깨달음에서 시작되는 해탈이다. 깨고 벗어나서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것.
아... 이렇게 연결되다니... 청소하다가...
암튼 청소 한 번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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